책을 읽다/단편소설

(11)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_ 최은영

우아한책장 2020. 5. 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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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젊은 작가상 수상작

 

1. 작가소개: 최은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3년 중편소설「쇼코의 미소」로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소설집 『쇼코의 미소』『내게 무해한 사람』을 펴냈다. 허균문학작가상, 김준성문학상, 이해조소설문학상,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구상 문학상 젊은 작가상,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다.

 

2. 줄거리

 

은행을 그만두고 대학교에 학사 편입한 늦깍이 학생 '희원'은 영어 에세에 수업에서 선생님을 만난다. 생리혈이 터진 것을 도와준 것을 계기로 희원과 선생님은 가까워지고 희원은 선생님의 에세이를 찾아보며 그녀가 자신과 다른 특별하고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믿게 된다.

희원은 수업 내내 선생님을 젊은 여자 강사이며 정교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례하게 구는 학생들로부터 차별을 개인의 문제로 끌어내리려는 행위를 목격한다. 선생님은그러한 무례함에 단호하게 대처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며 수업을 이끌어 나간다. 그러던 중 희원은 에세이를 발표하며 자신이 살고 있더 용산과 용산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되는데 선생님은 어떠한 사안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내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건 무관심이고 능동적인 순종이라고 말한다. 희원은 편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게 두려워 소극적으로 글을 썼던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수업 뒷풀이에서 돌아오는 길 선생님은 여자 강사로서 조교수로서의 자신의 위치로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을 무시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어색하게 헤어진 후  한참이 지나 희원은 대학원에 진학한다. 무너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자신의 빛'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를 떠올린다.

 

3. 감상

 

조직에서의 약자로서 개인의 의견을 잃어버리고 침묵하게 되는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여겼고, 동질감을 주는 선생님은 일종의 선구자 같은 존재고 결국은 희원 역시 그 길을 따라가며 그녀와 겪었던 일들을 곱씹으며 그 속에서 '아주 희미한 빛'을 찾길 바라며 '겨울의 한가운데'를 건너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 인물의 공감과 갈등의 과정이 최은영 작가 특유의 섬세함을 담아 잘 그려졌다.

 

 최은영 작가는 인물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과거를 회상하고 그로부터 주인공의 변화하는 감정을 포착하는 소설을 주로 쓰는 것 같다. 문장의 담담한 울림에도 불구하고 다소 신파적인 면도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자신의 위치에서 한발 나아가려는 강인한 여성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4. 문장수집

 

나는 그떄 내가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언젠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며 긴 숨을 내쉬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보일 것처럼 떠올랐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수치스러웠다. 내가 그 글을 쓰면서 남들에게 어떻게 읽힐지 의식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생각이나 느낌을 그대로 담았을 때 감상적이라고, 편향된 관점을 지녔다고 비판받을까봐 두려워서 나는 안전한 글쓰기를 택했다. 더 용감해질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해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나는 홀로 몰두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잘했다. 몰두하면 시간이 가고, 시간이 가면 그곳에서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나는 그 수업의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시멘트에 밴 습기가 오래도록 머물던 지하 강의실의 서늘한 냄새. 천원짜리 무선 스프링 노트 위에 까만 플러스펜으로 글씨를 쓰던 느낌. 그녀의 낮은 톤의 목소리가 작은 강의실에서 퍼져나가던 울림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과제로 내준 에세이들이 좋았고, 혼자 읽을 떄는 별 뜻 없이 지나갔던 문장들을 그녀가 그녀만의 관점으로 해석할 때, 머릿속에서 불이 켜지는 느낌도 좋았다. 나도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발견할 때 행복했고, 나는 그 행복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던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가만히 그곳에 앉아 깨닫고 했다. 가끔은 뜻도 없이 눈물이 나기도 했다. 너무 오래 헤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